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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log(나의 이야기)

도둑맞은 나의 기억력

by youni900 2024.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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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내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정말 중증이 아닐 수 없다. 예전엔 정말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누구나 다 유년 시절엔 총명했으리라) 

 

정말 나는 기억력을 도둑맞은 것 같다. 

예전에는 누구보다 학생들의 이름도 잘 외우고, 특징도 세세하게 기억했다. 심지어 학반 번호까지 외우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더랬다. 누가 나에게 언제 무슨 얘기를 했는지, 그 날의 공기와 냄새까지 기억할 정도로 나의 기억력은 남달랐다. 덕분에 학창 시절에는 공부도 꽤 잘 했다. 수업 시간에 어떤 선생님이 무슨 농담을 했는지까지 기억할 정도였으니 시험 문제 정도야 눈 감고도 그 선생님이 의도한 정답을 기가 막히게 잘 찍어낼 수 있었다. 

 

근데, 그러했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무슨 말을 하든, 문장 앞에 "저,저,저... 그.. 있잖아."를 붙이기 시작하더니, 그 말을 하는 사이에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까먹는 패턴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뭐, 사람이면 누구나 그럴 수 있지. 나는 애도 둘이나 낳았으니, 이정도면 양호하지. 스스로를 위로하고 안도했다. 

 

집안일만 할 때는 그럭저럭 잘 넘어가는 듯 했다. 애들을 시간맞춰 데리러 다니는 것 외에 딱히 중요한 일이 없었으니까. 연예인 이름 좀 생각이 안나는 거야 뭐 대수라고.. 전화번호 까먹는 거? 요샌 다들 안외우잖아? 이런 식으로 넘겼던 거 같다. 휴대폰을 차에 두고 내리고선 집안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도 뭐, 그럴 수 있지. 나도 사람이니까. 

 

때는 한창 기말고사 문제를 출제 중이던 6월의 어느 날이었다. 아이들은 아빠와 함께 놀이터로 쫓아내고, 시험문제를 내보겠다고 식탁에 앉았다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내 딸을 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도 뭔가를 시작하려면 엉덩이가 의자에 잘 붙지 않는다. 의자와 내 엉덩이는 자석의 같은 극인가... 왜 이렇게 서로를 밀어내는지, 원.) 도저히 집에서는 집중을 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 근처 카페로 발을 옮겼다.

 

굳은 의지와 결의에 찬 눈빛은 컴퓨터 가방을 열자마자 사라졌다. 내 usb가 없다! 어떡하지? 분명 가방 속에 넣어왔던거 같은데, 어딜 간거지? 그 안에 같은 학년 선생님이 먼저 낸 시험 문제도 들어있는데. 사라졌다. 가방을 뚫을 기세로 온 구석구석 다 뒤져보았지만 없다. 가방에 정말 구멍이 뚫린 건가? 눈 앞이 캄캄해진다는게 이런건가? 어디다 떨어뜨린건가? 분명히 가방에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 나는 나의 기억력을 믿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또 어디다 놓고 잊어버리고 있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이건 둘째가 고슴이를 쓰레기통에 넣어두고 못찾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나의 실수로 다른 사람까지 피해를 볼 수 있다. 시험 문제를 몽땅 갈아엎어야 할 수도 있다. 안될 말이다. 학교에 두고 온거겠지? 서랍 속에 얌전히 있는거겠지? 서랍은 항상 잠그고 다니니까 괜찮은 거겠지?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어지럽혔지만, 일단은 나를 믿어보기로 했다. 분명 또 가방 속에 넣으려고 생각만 하고 그새 까먹고 실행하지 않았을 건망증 심한 나를 믿어보자. 심호흡을 깊게 다섯 번 쯤 하고, 미리 주문해둔 커피를 한 번에 쭉 들이킨 후 깨끗한 새 문서에 작업을 시작했다.

 

그렇게나 걱정스럽던 usb 실종도 벌써 또 까먹었다. 창작의 고통 끝에 시험 문제를 모두 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는 이제 그 작은 저장장치는 내 안중 어디에도 없다. 

 

주말 동안 내 할일은 다 했으니 월요일 출근길도 참 발걸음이 가볍다. 시험 문제를 내고 나면 항상 마음이 후련하다. 근데, 오늘은 이상하게 가벼워도 너무 가볍다. 이런 생각을 하며 교무실 문을 열고 평소와 다름없이 힘차게 인사를 하고, 문득 생각나 나의 서랍을 열었다. 역시! 나는 건망증 많은 나를 믿길 잘했다, 싶었다. 까만색 usb는 책상 서랍 안, 클립 더미에 고스란히 함께 몸을 숨기고 있었다. 후유. 짙은 한숨이 나왔다. 나를 정말 어쩜 좋으니, 으이그. 어서 내 문제와 동료 선생님 문제를 함께 편집해야지. 자, 컴퓨터를 켜볼까. 

 

이쯤에서 다들 눈치채셨으리라. 오늘 가벼웠던 것은 마음 뿐만이 아니었단 것을. 정말로 발걸음도 가벼웁게, 나는 나의 노트북 컴퓨터를 문 앞에 동그마니 두고 룰루랄라 출근을 했던 것이다. 잊어버리고 그냥 갈까봐, 발에 차여야 가지고 갈 걸 아니까, 현관 중문 앞에 놔두고서도 그걸 눈으로 보고 그냥 나왔다니. 나는 정말 나를 믿을 수 없었다. 

 

이 기억 도둑놈. 밥도둑도 아니고, 가져갈게 없어서 내 기억력을 가져가니. 오늘 하루 수업은 어떻게 하지? 시험 문제 제출이 언제까지더라? 고민한들,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엔 이미 늦었다. 부랴부랴 여분 컴퓨터를 받아들었지만 하루 종일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질리 만무하다. 어떻게 오늘을 마무리했는지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문득, 우리 엄마는 어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짜증이 많은 딸이다. 특히 엄마에게. 우리 엄마는 내가 얘기하면 돌아서면 까먹는다. 내가 언제 어디를 간다고 얘기를 해도 금세 까먹고 또 묻고, 또 묻고. 그럴 때면 정말 안그래야지 하면서도 또 짜증을 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내가 전에 얘기했잖아!" 나의 짜증 단골 멘트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 엄마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언젠가부터는 그냥 그마저도 그러려니했다. 우리 엄마는 원래 잘 까먹으니까. 

 

아니다. 아니었다. 원래 잘 까먹는게 아니라는걸 나이가 들어 내가 이지경이 되고나서야 이해가 된다. 까먹고 싶어서 까먹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되어가는 것이었는데. 나는 왜 그렇게 그걸 못견뎌서 날이 선 말들을 했어야 했나. 너는 뭐가 그리 잘났다고, 정말. 

 

오늘도 퇴근 길에 양손을 좀 무겁게 해야겠다. 엄마,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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